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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미대 졸업 후 취직이 아닌 해외유학을 선택한 이유

런디 2021. 4. 1. 04:09

며칠 전에 클럽하우스에서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할지 아니면 대학원 해외유학을 갈지 고민하는 방이 있었다. 나도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을 복수 전공하고 빠듯하게 졸업하며 많이 고민했던 이야기라 이렇게 여기서 적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취직, 취집 모두 미루고 값비싼 유학을 선택했고 영국으로 향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런던에 이제 5년 차 거주 중이다.

우선 나는 대학은 포항에서 나왔고 본가는 부산인 일단 지방러이기에 디자이너로 취직을 하기 위해선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부산이나 포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려면 마땅한 디자인 에이전시도 없었기에 '대부분 인쇄소에서 일하는 거 아냐?' 이런 무지함도 있던 어린 시절이었으니 이해 바란다. 그래서 일단 취직을 선택한다고 해도 고민이 너무 많았다. '취업준비기간 동안에도 서울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월세는?', '취준이 얼마나 길어질지 누가 아냐'. 월세 같은 현실적인 고민 외에도 졸업을 하자 말자 디자이너 커리어적으로도 큰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학교 내에서는 학점도 적당히 잘 받으며 디자인 잘한다고 응원받으며 지냈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에 불과했달까. 그런 불안한 마음에 다시 예전에 가지 못했던 유학에 대한 아쉬움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보 같지만 '그때 유학을 갈 수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낫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 때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학사 유학을 간 것보다 석사 유학을 간 것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뒤에 다시) 그래서 그때 하지 못했던 길로 가기 위해 한번 마지막으로 도전을 해보고 안된다면 취직을 하기로 결정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졸업 직후 바로 대학원을 지원해야겠다고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수님들의 추천서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졸업 후 오백 년 뒤에 찾아와서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드리기 그래서 이번에 아예 추천서를 미리 받아서 연습 삼아 도전하고 진짜 지원은 내년에 연도만 바꾸어 쓸려던 속셈이었다.

마지막 학년에는 학교가 있던 포항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2월 졸업을 하고 딱 2달간 그 자취방에서 더 지내다가 본가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때 결정을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자신에게 2 달이라는 제한시간을 준 것이었다. 2달 동안 나는 우선 가고 싶은 학교 리스트 10군데 정도 인터넷을 통해 검색했고 그 학교에 시각 디자인이나 서비스 디자인 학과가 있는지 확인해서 추려냈다. 그다음에는 나라별로 묶어서 어느 나라에 가고싶은 학교가 가장 많은지 골랐다. 나라마다 석사 준비해야 할 서류나 시험이 달랐기에 한 나라를 선택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준비한 것: 작업 7-10개 정도 포함된 영문 포트폴리오, IELTS 시험, 온라인 지원에 필요한 기타 서류

 

셜록 빠이자 유럽+영국에 대한 로망이 있기도 했던 나는 영국을 선택했고 2016년 봄, 런던예술대(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Ual)를 포함한 세 군데 학교에 지원을 했고 두 군데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Central Saint Martins)를 선택한 이유는 학교의 네임벨류도 있겠지만 다른 영국 석사 코스가 1년인데 비해 센마틴의 MA Graphic Communication Design 코스는 2년 코스였기 때문이다. 물론 학비도 그만큼 두배로 들어가지만 생애 첫 유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언어, 문화, 그 와중에 학교 작업까지 1년 내에 모두 흡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비가 없어서 중간에 알바도 정말 많이 했고, 중간에 포기할 생각도 했지만 2년 코스를 선택한 것에는 전혀 후회가 없다. 

솔직하게 디자인 유학을 처음 선택했을 때 내가 기대한 것은 다들 좋아하는 '유럽 감성의 디자인'을 몸에 익히고, 한국에 돌아와 저명한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날 성장시킨 것은 디자인 스킬도 아니고 엄청난 학교에서 얻게 되는 학연도 아니다. 이러면 실망하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위 디자이너 친구들이나 디자인 학과생들에게 자원(돈+시간)이 빠듯하게라도 있다면 꼭 해외 유학(특히 유럽)을 추천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기회이기 때문이다. 2년 동안 가장 많이 듣고 나 스스로도 답해야만 했던 질문은 '어떤 이유로 너는 왜 이러한 디자인을 했느냐?'(Why)이다. '그냥 이렇게 하면 레이아웃이 예뻐서요'를 듣고자 묻는 답이 아니기에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유학 중 여러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어떤 전시를 투어처럼 하루 종일 다니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모두가 디자이너로서 각자의 소신과 생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너무 무지하고 줏대가 없는 사람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이보다 조금 더 타이포그래피를 잘하고 레이아웃이나 색감 잘 쓰는 건 나라는 디자이너의 특별한 능력이 아닐 뿐 만 아니라 분명 어딘가에 나보다 훨씬 잘하는 디자이너가 이 세상에는 널렸기에 그럼 '나는 어떤 디자이너인가?'에 대한 고민을 유학 기간 내내 했었다. 이러한 고민들은 나중에 실제로 영국에서 취직을 시작할 때 원래 전공이었던 그래픽 디자인이 아닌 프로덕트 디자인으로 커리어 변환을 하게 된 주된 이유가 되었다. 

주로 유학과 취직을 양 손에 두고 고민할 때 유학을 선택했을 때 잃게 되는 기회비용은 당장 한국에서의 커리어 단절, 엄청난 학비, 그 후의 확실하지 않은 미래 보장 등이 있을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조금 더 쉽게 유학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나도 힘들었지만 부모님께서 학비도 많이 도와주셨고 일단 잃을 게 많지 않은 나라서 이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가능하다면 정말 조금이라도 더 일찍 한국이 아닌 해외에 나와 디자인을 공부해보길 추천한다. 언어와 문화 모든 게 다른 곳에 떨어졌을 때의 단점이기도 하면서 장점인 건 모든 걸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 같다. 특히 디자이너에게 사회와 사람을 새로운 관점으로 새삼 탐구한다는 건 너무나도 필요한 일인데 사실 한국에서 있다 보면 편하고 익숙한 거리에 그러지 쉽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여성 디자이너가 한국 사회에서 가게 되는 길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회사의 한 부품처럼만 쓰이다가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면 그 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 디자이너들의 길이 탄탄한 건 또 아니다. 다소 뜬금없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성 디자이너가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포지셔닝을 더 단단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해외 석사 과정이 나에게는 이런 부분에서도 힘을 기르는 좋은 경험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추천하는 것 같다.

처음 영국행을 선택했을 때는 석사 후에 이렇게 오래 영국에 눌러앉아 있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2016년 봄, 아무도 될 거라고 믿지 않았던 유학을 도전해보기로 했던 호기 어린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심지어 추천서를 써주신 교수님께서도 나의 합격을 놀라워하셨으니 정말 무식한 도전이었던 거다.물론 개개인마다 경험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너무 많은 유학길이었기에 아직도 이렇게 런던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다. 말주변이 없지만 나처럼 지방에서 태어나 나의 인생에 어떤 옵션이 있는지 알려줄 언니 하나 없는 사람에게 이 글이 응원이 되고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나가자 친구들아.